<박수근 미술관 전경>
전기적 소설을 썼던 박완서. 그런 그녀가 박수근과의 만남을 기억하며 쓴 작품이 <나목>이라는 것을 얼마 전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꺼내든 <나목>은 박수근을 좋아해서도, 박완서를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 자리에서 박수근과 박완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지 못했던 아쉬움에 뒤늦게 내 기억의 어떤 공간을 조금 알차게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게 조금 솔직한 표현이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서 담담하게 서술했으나 묵직하게 느껴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고스란히 <나목>이라는 작품에서도 느껴졌다. 다만,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유명한 화가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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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 살육의 참상을, 그것도 혈육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후 정신을 잃은 두 모녀가 있다. "어쩌다 계집애만 살아남았"냐며 푸념을 하며 죽은 아들들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머니, 그리고 죽은 오빠들의 죽음이 마치 자신으로 인해 빚어진, 게다가 살아 남았다는 것이 어머니에겐 '어쩌다'로 전락되어 상처가 지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딸. 그런 딸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이며, 사랑이며, 관심이며, 그런 포근한 인간성의 회복을 바랐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그런 딸 경에게 옥희도가 나타난다. 오히려 경보다 무기력하지만 눈에서 반짝이는 생동감을 지닌, 그리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그를 사랑하게 된 경. 그러나 결혼은 속물이라고 경멸하고 밀어냈던 태수와 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경의 속물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기혼이었던 옥희도와의 관계 정리를 통해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나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나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 응? 용감히 혼자가되는 거야. 용감한 고아가 돼봐. 경아라면 할 수 있어.
허망하게 죽은 오빠들에 대한 속죄 의식이었든, 아버지의 포근한 품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든 그녀에게는 슬픔을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 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 저 앙상한 가지에도 새 봄이 오고 있음을 경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옥희도의 마음이었을지도.
그리고 이제와 보니, 박수근 미술관에는 바로 그 나목처럼 박수근이 뜰에 앉아 무언가를 여전히 꽃 피우고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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